조선중기의 문신·학자인 신열도(申悅道 ; 1589∼1659)의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진보(晉甫). 호는 난재(懶齋). 흘(仡)의 아들이며, 교리 달도(達道)의 동생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여세에 경사(經史)에 통하여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27년 정묘호란 때에 인조를 호종하였다. 이듬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예조정랑, 정언을 거쳐 1638년 울진현감을 지내고 1647년 장령이 되어 민생에 대하여 상소하였고 뒤에 능주목사를 지냈다.
신열도의 천성은 순수하여 생각에 막힘이나 인색함이 한 점도 없었고, 털끝만큼의 거친 기상도 없었다. 집안에서 거처할 때 효성스러움과 우애심이 독실하였고, 제사를 받드는 것에도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마을에 거처할 때는 남에게 진실하면서도 베풀고 양보하여 미덥고 순함이 상하에 드러났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편안하고 고요하게 스스로를 지키고 구차히 함께하여 잘못 따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교화를 핵심으로 삼아 학문을 흥기시키는데 솔선하였다.
구휼의 방책을 건의하다.
1647년 수재와 한재로 인해 굶어죽는 백성들이 속출하자 신열도(申悅道)는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이번 수재와 한재를 만나 굶어 죽는 백성이 많으니 마땅히 현재 호조·남한(南漢)·강도(江都)에 있는 미곡의 수효와 삼남(三南)의 감영(監營)·병영(兵營) 및 통영(統營)에 저축된 미곡과 포목의 수효가 얼마인가를 총괄해서 계산하고, 또 1년의 경비 및 외국 사신에 필요한 불시의 수요가 얼마인가를 총괄해서 계산하여 종류대로 모아 연구해서, 만약 지금 있는 것으로 충분히 지탱할 수 있으면 금년의 부세(賦稅)를 모두 탕감하고 만약 혹 이 숫자에 모자라면 여러 도 가운데 아주 실농하지 않은 곳에서 절반의 세금을 거두어 1년 경비를 지탱한다면 공물을 전부 감하니 헤아려 감하니 하는 등의 구구한 말을 할 필요 없이 온 나라 백성들이 균등하게 은택을 입어 생기가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
:
신원록(申元祿)
생부
:
신흘(申仡)
모
:
순천(順天) 박씨(朴氏) 박윤(朴倫)의 딸
형제
:
신달도(申達道), 신적도(申適道)
집안 이력
아주(鵝洲) 신씨(申氏)의 시조는 고려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영미(英美)이다. 대표적 인물은 우(祐)인데, 그는 충혜왕 때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으며, 지극한 효자로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크게 벼슬을 한 사람은 없으나 학자와 효행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다. 우의 6대손 원록(元祿)은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손자 3형제 중 적도(適道)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역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달도(達道)는 삼사(三司)를 역임하고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효자로 이름 조부 신원록
신원록은 11세에 부친이 중풍에 걸려 치료가 어렵자, 팔공산에 올라가 손수 약초를 캐서 유능한 의원의 조제를 받아 밤낮으로 끓여 올렸다. 무릇 8년 동안이나 밤을 지새워가며 부친을 정성껏 간호하였다. 신원록은 모친이 90세가 되도록 의복이나 변기를 남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세탁하였고, 똥을 맛보아 증세를 판단하였으며,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등 갖은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같은 해 6월 모친이 93세로 돌아가시자 날마다 성묘를 하고, 미음만 마시고 다른 것은 입에 가까이하지 않아 결국 여막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1590년 향인들이 신원록의 행적을 적어 고을 수령에게 올리므로 인해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1600년에 향인들이 다시 글을 올려 을묘년(1615)에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아울러 호조참의에 추증되고『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에 그의 효행사적이 실리게 되었다.
스승
:
장현광(張顯光)
학파
:
퇴계 학파
큰 재주를 지니다
신열도는 9세 때 이미 경전과 역사에 통달했고 글을 잘 지었다. 인재(訒齋) 최현(崔晛)이 항상 그의 재주를 작게 이루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 칭찬했다. 17세 때 도(道)의 도회(都會)에서 뽑혀 18세에 진사(進仕)에 합격했다.
스승의 풍모를 흠모하다.
1603년 스승 장현광이 의성으로 부임해왔다. 선생은 명륜당(明倫堂)에 앉아서 제생들과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시고는 훈장(訓長)과 제생들은 차례로 앞줄에 앉히고 아이들은 또 그 다음 줄에 앉힌 다음, 이들과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하였다. 제생 중에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선생은 반복하여 가르쳐 주었으며 질문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대답하였는바, 말소리가 크고 통창(通暢)하시어 온 좌중이 경청하였다.
신열도는 어린 나이로 책을 끼고 맨 말석(末席)에 앉아 있었는데, 선생을 우러러보니 기상(氣象)이 혼후(渾厚)하고 위의(威儀)가 엄정(嚴整)하여 자기도 모르게 숙연(肅然)하여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다.
1622년 봄에 신열도는 신달도와 함께 남산으로 와서 스승을 뵙고, 저녁에는 모시고 부지암(不知巖)으로 가서 이틀 동안 머물러 모시면서『근사록(近思錄)』의 의심스러운 부분 10여 조항을 질문하였다.
스승의 건강을 염려하다.
신열도는 스승인 장현광이 안거(安車)로 부르는 명령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뵈었는데, 스승이 여러 친구들이 전별(餞別)함으로 인하여 연일 술을 드셨다. 이에 신열도는 “식사는 적게 하시면서 술을 너무 많이 드시니, 혹 이로 인하여 건강이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스승이 “술의 힘이 노인을 보양함은 어린아이가 젖을 먹는 것과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대의 말이 또한 좋으니,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고 말하였다.
나재문집(懶齋文集)
『나재문집』은 의성지방의 학자 신열도(申悅道)기 지은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9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은 시 127수가 실려 있다. 권 2는 교지(敎旨), 사제문(賜祭文), 소(疏), 계(啓)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무인응지소(戊寅應旨疏)」는 울진현령(蔚珍縣令)으로 있을 때 왕명에 따라 올린 보고서로, 흉년이 계속되어 주민의 생활이 어려우므로 세금을 경감하여줄 것과 부역을 줄이며 고을재정에 국고보조를 하여줄 것을 요청한 내용이다. 「청물견신사잉자핵계(請勿遣信使仍自劾啓)」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한 조정의 공의에 반대하여 강화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권 3은「조천시문견사건계(朝天時聞見事件啓)」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1628년(인조 6)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7월 11일 서울을 출발하여 명나라의 남경까지 갔다가 이듬해 윤 4월 11일 평양에 돌아올 때까지 도중에서 보고들은 일들과 중국 사람들과 통화한 내용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보고한 여행기록이다. 권 4는 정문(呈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정등주군문변무문(呈登州軍門辨誣文)」은 등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군대에 잘못 전달되어 명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오해가 생긴 일에 대하여 사실을 밝힌 외교적인 문서이다. 권 5는 장현광(張顯光)·심지원(沈之源)·김세렴(金世濂)·김응조(金應祖)·김치관(金致寬)·김경장(金慶長)등 당대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권 6은 장현광(張顯光)에게 입문의 예를 마치고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기록한「배문록(拜門錄)」과 자기의 사상과 취지를 밝힌「나재설(懶齋說)」의 잡저와 각종 서발(序跋), 그리고 상량문(上樑文), 축문(祝文), 제문(祭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7은 각종 제문과 묘표(墓表)로 구성되어 있다. 권 8은 행장, 권9는 부록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외에도 『선사지 仙槎志』와 『문소지 聞韶志』등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신열도(申悅道)의 시문집. 9권 4책. 목판본. 서문과 발문이 없다.
권1∼3에 시 127수, 교서 2편, 사제문(賜祭文) 2편, 소 4편, 계 11편, 권4·5에 정문(呈文) 8편, 서(書) 35편, 권6∼8에 잡저 2편, 서(序) 2편, 발 7편, 상량문 4편, 축문 14편, 제문 17편, 묘표 1편, 묘지명 5편, 행장 4편, 권9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체로 기상이 호방하나 감상적인 면이 있다. 그 가운데 〈등소공대 登召公臺〉는 소공대에 올라서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을 읊은 것이고, 〈야문실솔유감 夜聞蟋蟀有感〉은 밤에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가을의 정취 속에서 인생의 무상을 한탄한 것이다. 〈문노적동창야불능매 聞奴賊東搶夜不能寐〉는 청나라의 침입 소식을 듣고,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느라고 밤새 잠을 못 이루는 안타까운 심회를 읊은 것이다.
소 가운데 〈무인응지소 戊寅應旨疏〉는 울진현령(蔚珍縣令)으로 있을 때 왕명에 따라 올린 보고서로, 흉년이 계속되어 주민의 생활이 어려우므로 세금을 경감해 줄 것과 부역을 줄이며 고을 재정에 국고보조를 해주도록 요청한 내용이다.
계 가운데 〈청물견신사잉자핵계 請勿遣信使仍自劾啓〉는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위해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한 조정의 공의에 반대해 강화사신을 보내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조천시문견사건계 朝天時聞見事件啓〉는 1628년(인조 6)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이 되어 7월 11일 서울을 출발해 명나라의 남경까지 갔다가 이듬해 윤4월 11일 평양에 돌아올 때까지 도중에서 보고들은 일들과 중국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보고한 여행기록이다.
〈정등주군문변무문 呈登州軍門辨誣文〉은 등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군대에 잘못 전달되어 명나라와 우리 나라 사이에 오해가 생긴 일에 대해 사실을 밝힌 외교적인 문서이다.
이 밖에 장현광(張顯光)에게 입문의 예를 마치고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기록한 〈배문록 拜門錄〉과 자기의 사상과 취지를 밝힌 〈나재설 懶齋說〉이 있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도에 해난을 당한 사신을 제사한 〈제표사신문 祭漂使臣文〉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명 칭
:
단구서원(丹邱書院)
소 재 지
: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산25-1 (원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산 25-1)
건축시기
:
1858년(철종 9)
중건시기
:
1873년(고종 10)
건축 배경
이 서원은 신석우(申錫祐, 1816~1881)가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들을 가르치다가 그가 주관하여 신적도(申適道)와 신열도(申悅道)의 충성을 기리고 신채(申埰)의 유학사상을 전승시키기 위해 1858년(철종 7)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건립하였는데, 그들을 배향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서원 앞 공적비에 새겨진 글과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에 따르면 1873년(고종 10)에 다시 제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다가 1989년에 전 민선 대전시장(前 民選 大田市長) 신기훈(申基勳)의 주관으로 묘우(廟宇)를 복원하고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부지임야 534평은 후손 신원효(申源孝)가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해인 1990년에 신달도(申達道)를 추봉하였다.
건축 특징
신적도, 신열도, 신달도, 신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상덕사(尙德祠)는 나지막한 축단 위에 지어졌고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동재(東齋)인 거인재(居仁齋) 또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당을 가운데로 하여 좌우로 협실을 두었으며, 당은 뒤로 문을 열 수 있게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서재(西齋)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정면에서 우측을 제외한 두 칸은 앞에 마루를 두었다.
건축 구성
솟을대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상덕사(尙德祠)가 정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우에는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동재는 거인재(居仁齋)라고 편액되어 있으나 서재는 편액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동재에는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와 「단구서원상량문(丹邱書院上樑文)」이 표구된 액자가 걸려있다.